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흥왕 순수비 (문단 편집) ===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 [include(틀:북한의 유적지)]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마운령비.jpg|width=100%]]}}}||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용산리[* 광복 당시 주소]에 진흥왕이 설치한 비석. [[고구려]]가 지배하고 있던 현재의 [[북한]] [[함경남도]] 해안 지역을 정복하고 [[568년]]에 이원군 동면 용산리 사동(寺洞) 만덕산[* 단천과의 경계선 지역이다.] 봉우리 아래에 세운 순수비. [[진흥왕]] 시기 [[신라]]의 북방 경계를 알려주는 귀한 사료로,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비 중 가장 먼 곳에 세운 비석이다. [[황초령비]]와 마찬가지로 현재는 북한에 있으며 [[북한의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다. 함경도 오지에 있어 신라 멸망 후 오랜 세월 잊혀져 있던 비석을 [[조선시대]]의 지리학자 한백겸이 확인했지만 이후 조선 후기에는 다시 위치가 잊혀져 [[김정희]] 시대에도 소문으로만 알려져 있었고, 워낙 먼 곳이라 직접 답사하기도 힘들다 보니 존재를 의심받았다. 현지 백성들은 비석 자체는 알았지만 한문으로 쓰여있는 비문을 읽지 못해 [[남이]] 장군의 비석으로 막연하게 잘못 불렀는데, [[일제강점기]] [[1929년]] 역사학자 [[최남선]]이 현지조사를 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황초령비와 내용은 물론 왕을 옆에서 수행한 인물 명단도 거의 비슷해 거의 비슷한 시점에 같이 세웠다고 추정한다.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보존 상태가 다른 순수비보다 좋은 편이다. 그래서 훼손이 심한 황초령비의 내용에서 지워진 부분을 마운령비의 내용으로 대신 파악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현재는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 중.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마운령비.png|width=100%]]}}}|| >'''비양면(碑陽面; 전면)''' >[[태창]] 원년(太昌元年) 세차(歲次) 무자(戊子) ○○ 21일 ○○ ○흥대왕(興大王)이 ○○를 순수(巡狩)하여 돌에 새겨 기록하였다. >무릇 순풍(純風)이 일지 않으면 세도(世道)가 참됨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펴지지 않으면 사악(邪惡)한 것이 서로 경쟁하도다. >그러므로 제왕이 [[연호]](年號)를 세움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짐]](朕)은 역수(曆數)가 몸에 이르러 위로는 [[성한왕|태조(太祖)]]의 기틀을 이어받아 왕위를 계승하여, 몸을 조심하며 스스로 삼가나 하늘의 도리를 어길까 두렵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紙)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아래로 스스로 헤아려 신구민(新舊民)을 무육(撫育)하였으나 오히려 말하기를 왕도의 덕화(德化)가 고루 미치지 아니하고 은혜가 베풀어짐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수레를 타고 나가 10월 2일 계해(癸亥)에 이르러 … 인하여 변계(邊堺)지역을 설유(說諭)하였다. >---- >'''비음면(碑陰面; 후면)''' >이때 수레를 따른 자로 사문(沙門) 도인(道人)은 법장(法藏)과 혜인(慧忍)이다. >대등(大等)은 훼부(喙部) 거칠부지(居朼夫智) 이간(伊干), 내부지(內夫智) 이간(伊干), 사훼부(沙喙部) 모력지(另力智) 잡간(迊干), 훼부(喙部) 복동지(服冬知) 대아간(大阿干), 비지부지(比知夫知) 급간(及干), 미지(未知) 대나말(大奈末), 급진부지(及珎夫知) 나마(奈麻)이다. >집가인(執駕人)은 훼부(喙部) 만혜(万兮)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모지(另知) 대사(大舍)이다. >이내종인(裏內從人)은 훼부(喙部) 급혜차(汲兮次) 대사(大舍), 사훼부(沙喙部) 비시지(非尸知) 대사(大舍)이다. >약인(○人)은 사훼부(沙喙部) 위충지(爲忠知) 대사(大舍)이고, 점인(占人)은 훼부(喙部) 여난(与難) 대사(大舍)이고, 약사(藥師)는 독지차(篤支次) 대사(大舍)이다. >나부통전(奈夫通典)은 본피부(本彼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이고, ○○는 본피부(本彼部) 막사지(莫沙知) 길지(吉之)이고, 급벌참전(及伐斬典)은 훼부(喙部) 부법지(夫法知) 길지(吉之)이다. >이내(裏內)○○○○○○○명(名) 길지(吉之)이고, 당래객(堂來客) 이래객(裏來客)은 50이고, 외객(外客)은 ○○ ○○○○○○○○○○지(智) 사간(沙干)이다. 조인(助人)은 사훼부(沙喙部)의 순지(舜知) 나말(奈末)이다. > > 이종욱(서강대 사학과 교수) 역 황초령비와 마운령비의 내용은 요약하면 태창 원년(진흥왕 29년, 서기 [[568년]])에 [[진흥왕]]이 순수에 나서 영토를 살피고 새긴다는 내용, 순수의 의미와 이유로 왕도정치의 표방, 진흥왕이 영토를 넓히고 백성과 토지를 얻었다는 자부심, 아직 왕이 은혜가 미치지 못한 곳이 있어 영토를 순수하고 민심을 위로한다는 내용 등을 열거하고 있다. 또 적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하는 부분도 있다. 그 뒤에는 진흥왕을 곁에서 수행한 여러 신하들의 명단을 쭉 써놓은 수가인명이 등장하는데 비석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여기에는 [[승려]], 고위 [[관리]], [[점쟁이]], [[약사]] 등 자잘한 임무를 맡은 사람들까지 기록해 놓아 진흥왕을 따라나선 다양한 구성원들을 엿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